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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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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가문 간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여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1614년 시작된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측은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펼쳤고, 1615년 여름 전투에서는 야전을 시도했으나, 도쿠가와 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는 자결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통일하고, 겐나 앤부를 통해 대규모 전투를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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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카 전투 - 사나다마루
    사나다마루는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사카성 남쪽에 구축한 요새로, 도요토미 씨족의 거점을 방어하며 도쿠가와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현재 사나다야마 공원 일대에 흔적과 현창비가 남아있다.
오사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오사카 전투
다른 명칭,
일부센고쿠 시대 후반 및 에도 시대 초반
시기1614년 11월 8일 – 1615년 1월 22일 및 1615년 5월 – 6월
장소오사카성, 오사카, 일본 및 주변 지역
원인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새로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준비함.
결과도쿠가와 막부의 승리; 막부에 대한 모든 위협이 일시적으로 제거됨.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도쿠가와 막부 및 그 충성파 휘하:
마쓰다이라 씨
다테 씨
혼다 씨
도도 씨
구로다 씨
이이 씨
호소카와 씨
마에다 씨
하치스카 씨
니와 씨
아사노 씨
미즈노 씨
사카이 씨
교고쿠 씨
사타케 씨
우에스기 씨
모리 씨
교전 세력 2도요토미 씨 및 그 충성파 휘하:
오다 씨 (변절)
쓰쓰이 씨
사나다 씨
도요토미 가신
지휘관
지휘관 1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도 다카토라
이이 나오타카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다테 마사무네
혼다 마사노부
혼다 다다토모
사타케 요시노부
아사노 나가아키라
마에다 도시쓰네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히데나리
사나다 노부유키
호소카와 다다오키
미즈노 가쓰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지휘관 2도요토미 히데요리
요도도노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 모토쓰구
쓰쓰이 사다쓰구
아카시 다케노리
조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가쓰나가
후쿠시마 다카하루
기무라 시게나리
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다이스케
반 나오유키
오다 노부카쓰 (도쿠가와 측으로 변절)
호소카와 오키아키
병력
병력 1164,000명 (겨울), 150,000명 (여름)
병력 2120,000명 (겨울), 60,000명 (여름)
사상자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불명
관련 전투
주요 전투시기노
기즈가와
이마후쿠
바쿠로부치
노다-후쿠시마
사나다 마루
혼마치 교량
기슈
가시이
도묘지
야오
와카에
덴노지
기타
이미지
프랑수아 카론의 책에 실린 삽화: "오사카 성의 화재"
오사카 여름 전투 그림 병풍(쿠로다 병풍) 우척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2.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오대로 중 한 명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등을 격파하며 일본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에야스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대폭 축소시키는 등[25] 그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603년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연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안정적인 정권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회유하는 동시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양면 정책을 펼쳤다. 1603년 자신의 손녀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혼인시키고, 1605년에는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어 권력 세습을 명확히 했다.[14][28] 1611년에는 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 회견을 가지며[29][28] 도요토미 가문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여러 다이묘들에게 막부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아내며[30]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또한 이에야스는 천하부쇼(天下普請)를 통해 오사카성 주변의 성들을 정비하고[28], 대포 등 신무기를 확보하며[3] 군사적 대비를 갖추어 나갔다. 반면, 도요토미 가문은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우호적인 다이묘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점차 고립되었다.[25]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요토미 측은 막부의 허가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85] 낭인들을 오사카 성으로 모으는 등[14] 독자적인 세력 강화를 시도하며 막부와의 긴장 관계를 높여갔다.

이러한 갈등은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막부는 도요토미 가문이 재건한 호코지의 범종 명문에 대해, 이에야스에 대한 저주와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 의도가 담겨 있다는 빌미를 잡아[14]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만들었다. 사건 해명을 위해 파견되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오사카 성 내 강경파와의 갈등 끝에 성을 떠나자,[14] 이에야스는 이를 명분 삼아 같은 해 10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오사카 공격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었다.[14][33] 이 전투는 에도 막부의 일본 통일을 완성하고 센고쿠 시대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약 150년간 일본 내 대규모 전투가 종식되는 겐나엔부(元和偃武)로 이어졌다.[70][71]

2. 1. 도요토미 정권의 쇠퇴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는 오대로 중 한 명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다. 1600년(게이초 5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끈 서군을 격파하고 일본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전투 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대폭 축소시켜 셋쓰, 카와치, 이즈미 3개 국 약 65만 석 규모로 줄였다.[25]

1603년(게이초 8년)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고,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안정적인 정권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의 복속 혹은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결혼시키고(1603년), 1611년에는 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 직접 회견하는 등[29][28] 회유책을 쓰는 동시에, 오사카 주변의 성들을 보수하고 무기를 확보하며 군사적 압박도 병행했다.

한편, 도요토미 가문은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우호적인 다이묘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점차 고립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요토미 측은 막부의 허가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85] 낭인을 모으는 등 독자적인 세력 강화를 시도하며 도쿠가와 막부와의 긴장 관계를 높여갔다. 이러한 갈등은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계기로 표면화되었고, 결국 오사카 전투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1. 1.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권력 투쟁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요토미 정권은 명목상 오대로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오대로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1600년(게이초 5년), 이에야스는 전 오봉행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東軍)을 이끌고 미쓰나리가 중심이 된 서군(西軍)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에야스는 전후 처리와 논공행상을 주도하며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14]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소위 태합 직할령) 220만 석 중 약 4분의 3을 몰수하여 동군에 가담했던 다이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는 셋쓰, 카와치, 이즈미 3개 국의 약 65만 석 규모로 크게 축소되었다.[25]

1603년 3월 24일(음력 2월 12일),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후 에도 성을 중심으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새로운 정권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에야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쿠가와 가문을 정점으로 하는 안정적인 장기 정권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복속시키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14]

같은 해 7월,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갔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두 가문의 화합을 위한 조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히데요리를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14] 1605년(게이초 10년) 4월, 이에야스는 쇼군 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이는 천하의 통치권이 도요토미 가문이 아닌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세습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조치였다.[28] 동시에 이에야스는 고다이인을 통해 히데요리의 생모인 요도도노에게 히데요리가 자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요도도노는 이를 거부하며 양측의 긴장감이 높아졌다.[28]

1611년(게이초 16년) 3월, 고미즈노오 천황의 즉위를 계기로 교토에 온 이에야스는 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구했다. 오사카 성 밖으로 나서는 것에 대한 반대도 있었지만,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도요토미 가문에 은혜를 입었던 다이묘들의 중재로 회견이 성사되었다(니조성 회견).[29][28] 이 회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예상외로 총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회유책과 병행하여 군사적인 압박도 강화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인 1601년부터 제제 성을 시작으로 후시미성, 니조성, 히코네성, 사사야마성, 가메야마성, 나고야성, 히메지성, 우에노성 등 오사카 성을 포위하는 형태의 성곽들을 축조하거나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또한 구니토모(國友)의 대장장이들에게 대철포와 대포 제작을 명령하고,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대포, 화약, 납 등 전쟁 물자를 구매하며 전쟁 준비를 착실히 진행했다.

한편, 도요토미 가문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히데요시의 친척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유키 히데야스, 기노시타 이에사다, 가토 기요마사, 고이데 요시마사 등이 차례로 사망하고, 도요토미 가문에 은혜를 입었던 호리오 요시하루,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유력 다이묘들도 1614년까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조해진 도요토미 측은 막부의 허가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 낭인들을 오사카 성으로 모으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마에다 가문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 점차 막부와의 대결 자세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양측의 갈등은 점차 깊어져 갔으며,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은 결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 1.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장악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오대로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1600년(게이초 5년) 오봉행 출신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동군을 지휘하여 미쓰나리가 이끈 서군을 격파하고, 전후 처리와 논공행상을 주도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장입지(藏入地, 태합 직할령) 약 220만 석 중 4분의 3 가량이 몰수되어 동군 측 장수들에게 분배되었고,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는 셋쓰, 카와치, 이즈미 3개 국 약 65만 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25]

1603년 3월 24일(음력 2월 12일)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는 에도 성을 중심으로 정비 사업을 벌이며 정권 기반을 다졌다. 이에야스의 목표는 도쿠가와 가문을 정점으로 하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복속시키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갔다.

1605년(게이초 10년) 4월,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다. 이는 천하의 통치권이 도요토미 가문이 아닌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세습됨을 천명한 조치였다. 당시 히데요리는 우대신으로, 쇼군직을 계승한 히데타다의 내대신보다 명목상 관위는 높았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미 도쿠가와 가문으로 넘어간 상태였다.[26][27][28] 이에야스는 고다이인을 통해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에게 히데요리가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요도도노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야스는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오사카에 보내는 등 회유책을 시도하기도 했다.[28]

1611년(게이초 16년) 3월, 고미즈노오 천황의 즉위를 계기로 교토에 온 이에야스는 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구했다. 오사카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도요토미 가문의 은고 다이묘들의 중재로 회견이 성사되었다(니조 성 회견).[29][28] 이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유약할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당찬 모습을 보이는 것에 놀랐다고 전해진다.[14] 회견 이후 이에야스는 교토에 머물던 다이묘들을 니조 성에 소집하여 막부에 대한 충성 서약서를 제출하게 했고,[30] 이듬해에는 도호쿠, 간토 등지의 다이묘 65명에게도 같은 서약을 받았다. 그러나 히데요리에게는 서약을 요구하지 않았다.[30]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회유책과 병행하여 군사적 압박도 강화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인 1601년부터 제제 성 축조를 시작으로 후시미성, 니조성, 히코네성, 사사야마성, 가메야마성, 나고야성 등을 정비하고, 이후 히메지성, 우에노성까지 보수하며 오사카 성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서국 다이묘들을 압박했다. 또한 구니토모 대장간에 대철포(大鐵砲)와 대포(大砲) 제작을 명하고, 석포(石砲) 주조 및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대포, 화약, 납 등 전쟁 물자를 수입하며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

한편, 도요토미 가문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1611년 가토 기요마사, 1613년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1614년 마에다 도시나가 등 도요토미 가문에 우호적이던 다이묘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초조해진 도요토미 측은 막부의 허가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85] 병량과 낭인을 모으고 마에다 가문과 연대를 모색하는 등 막부와의 대결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614년, 도요토미 가문이 재건한 교토 호코지의 범종 명문이 문제가 되었다. 종에 새겨진 "国家安康|곳카 안코일본어"와 "君臣豊楽|군신 호라쿠일본어"이라는 문구가 문제가 되었는데, 막부는 '곳카 안코'가 이에야스(家康일본어)의 이름을 나누어 저주한 것이며('이름 금기'), '군신 호라쿠'는 도요토미(豊臣일본어)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며 막부에 반역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해석했다.[14] 이 '호코지 종명 사건'은 도쿠가와와 도요토미 가문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해명을 위해 스루가로 파견되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이에야스로부터 냉대를 받았으나, 뒤이어 파견된 오노 하루나가의 어머니 오쿠라쿄노쓰보네는 환대를 받았다. 이에야스는 가쓰모토에게 도요토미 가문이 ① 히데요리를 에도에 참근시키거나, ②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거나, ③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나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세 가지 안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오사카로 돌아온 가쓰모토가 이 안을 전하자 요도도노는 격분했고, 가쓰모토는 오노 하루후사, 와타나베 타다스 등 강경파로부터 이에야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암살 위협까지 느낀 가쓰모토는 결국 10월 1일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나와 이바라키성으로 물러났다.

이에야스는 가쓰모토의 퇴거 소식을 듣고 격노했으며, 오사카 성에 낭인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와 함께 이를 도요토미 가문 토벌의 명분으로 삼았다. 같은 날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들에게 출병 명령을 내렸고, 이로써 오사카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14][33]

2. 2.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갈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오대로 중 한 명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이후 실권을 장악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대폭 축소시켰다.[25] 1603년 에도 막부를 연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안정적인 정권 구축을 목표로 삼았으며,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복속시키거나 제거하려 했다.[28]

이에야스는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혼인시키고(1603년), 쇼군직을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며(1605년) 권력 세습을 명확히 하는 한편, 니조성 회견(1611년) 등을 통해 도요토미 가문을 회유하고 압박하는 양면책을 구사했다.[29][28] 또한 천하부쇼를 통해 오사카성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28], 무기 확보에도 힘썼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하던 다이묘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25] 도요토미 가문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도요토미 측은 막부의 허가 없이 관위를 받거나[31][85] 낭인을 모으는 등[14] 점차 막부와의 대결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갈등의 도화선은 1614년 호코지 종명 사건이었다. 도요토미 가문이 재건한 호코지 범종의 명문 "国家安康(국가안강)"과 "君臣豊楽(군신풍락)"을 막부가 문제 삼아, 이에야스(家康)에 대한 저주와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부흥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14]

사건 해명을 위해 파견된 도요토미 가문의 중신 카타기리 가쓰모토는 이에야스로부터 굴욕적인 요구를 받았고,[14] 오사카성으로 돌아온 뒤 내통 의심을 받아 강경파와의 대립 끝에 성을 떠나게 되었다.[14] 이에야스는 이를 명분으로 1614년 10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오사카 공격 명령을 내려 마침내 오사카 전투가 발발했다.[14][33] 이 전투는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과 전국 시대의 완전한 종식을 가져왔으며, 이를 겐나엔부(元和偃武)라고 부른다.[70][71]

2. 2. 1. 센히메의 혼인과 쇼군직 계승

1603년 7월(음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갔다.[14] 이는 표면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유지를 잇는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도요토미 가문을 에도 막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조치였다.[14]

게이초 10년(1605년) 4월 16일,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양위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이전 관직이었던 우대신 자리는 히데요리에게 양위하였다. 비록 형식상 히데요리가 히데타다(내대신)보다 높은 관직을 받았으나, 쇼군직의 세습 자체는 천하집정 권력이 도요토미 가문이 아닌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세습된다는 사실을 전국에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28]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쇼군직 양위 직후인 같은 해 5월 8일, 이에야스는 고다이인을 통해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에게 히데요리가 신하로서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며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했다.[84][28] 요도도노는 이 요구를 거부하며 양측 관계가 경색되었으나, 이에야스는 한편으로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오사카에 보내는 등 회유책을 병행하기도 했다.[28] 쇼군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이에야스는 여전히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유지했다.[14]

2. 2. 2. 니조성 회견과 다이묘들의 충성 맹세

1611년(게이초 16년) 3월,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를 받은 고미즈노오 천황이 즉위하자 교토로 상락(上洛)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니조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청했다. 히데요리가 교토로 가는 것에 대해 도요토미 가신들 사이에서는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의 중재로 회견이 성사되었다(니조성 회견).[29][28] 이 회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행동거지에 놀랐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히데요리가 유약하다는 당시의 통념과 달랐기 때문이다.[14] 회견으로 양측의 긴장은 일시적으로 완화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612년(게이초 17년) 4월, 이에야스는 교토에 머무르고 있던 다이묘 22명을 니조 성에 소집하여 에도 막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내용의 기청문(起請文, 맹세문)을 제출하게 하였다.[30] 같은 해, 전년에 상락하지 않았던 도호쿠 지방간토 지방 등의 다이묘 65명으로부터도 유사한 맹세를 받아냈다. 하지만 히데요리로부터는 이러한 맹세를 받지 못했다.[30]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사노 나가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가토 기요마사(1611년),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1613년), 마에다 도시나가(1614년) 등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하던 주요 다이묘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측은 초조함 속에서 막부에 알리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85] 병량과 랑인을 모으고 마에다 가문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점차 막부와의 대결 자세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2. 2. 3. 천하부쇼와 도요토미 가문 포위망 구축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1603년 정이대장군에 올라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에야스의 목표는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정권 구축이었으며, 이를 위해 과거 주군 가문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복속시키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28]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고(1603년), 1611년 니조성에서 히데요리와 회견하는 등[29][28] 표면적으로는 융화책을 펼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605년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어 권력 세습을 공식화하고, 히데요리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는 등[28]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압박을 병행했다.

이러한 정치적 압박과 동시에, 이에야스는 군사적 준비도 착실히 진행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인 1601년부터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공사를 분담시키는 '''천하부쇼'''(天下普請)를 통해 주요 거점 성곽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28] 이는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소모시키고 막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효과와 더불어,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천하부쇼를 통한 주요 성곽 정비[28]
연도 (게이초)성곽주요 내용비고
6년 (1601년) 이후제제 성축성 시작후지 도도 다카토라 협력
6년 (1601년) 이후후시미성보수
6년 (1601년) 이후니조성보수1611년 히데요리와 회견 장소
6년 (1601년) 이후히코네성보수
6년 (1601년) 이후사사야마성보수
6년 (1601년) 이후가메야마성 (단바국)보수
6년 (1601년) 이후기타노쇼성재건·조영
6년 (1601년) 이후나고야성재건·조영도요토미 가문 동원 시도 및 거부
6년 (1601년) 이후에도 성대개축막부의 본거지
6년 (1601년) 이후순푸성대개축오고쇼 이에야스의 거점, 히데요리 영지에도 오백석부 부과[28]
6년 (1601년) 이후히메지성대개축·보수서쪽 다이묘 견제
6년 (1601년) 이후우에노성대개축·보수



이러한 성곽 정비는 오사카성을 포위하고 서쪽 다이묘들을 압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막부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구니토모 대장간에 대철포(大鐵砲)와 대포(大筒) 제작을 명령하고, 석포(石火矢) 주조, 영국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청동포, 화약의 원료인 염초, 포탄 재료인 등을 대량으로 구매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3]

한편, 1611년 니조성 회견 이후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하던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이케다 데루마사 등 은고(恩顧) 다이묘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25] 도요토미 가문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도요토미 측은 막부에 알리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거나[31], 병량과 낭인을 모으고 마에다 가문과 접근하는 등 막부와의 대결 자세를 점차 분명히 했다. 히데요리는 여러 다이묘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하지스카 이에마사, 시마즈 타다츠네, 이케다 타다카쓰, 모리 테루모토 등 대부분의 다이묘는 막부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거나 심지어 사자를 체포하는 등[1][2] 도요토미 가문의 외교적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호코지 종명 사건

호코지 종. 이 종에 새겨진 명문이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되었다.


1614년(게이초 19년), 히데요리아버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하던 교토 호코지(方廣寺)의 대불전이 완공되었다. 4월에는 큰 범종도 완성되었는데, 이 공사를 총괄하던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난센지(南禅寺)의 승려 분에이 세이칸(文英清韓)에게 종에 새길 명문(銘文) 작성을 의뢰했다.[32][33][35] 가쓰모토는 슨푸에 머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명문 선정 과정과 대불 개안 공양(불상에 눈을 그려넣어 생명을 불어넣는 의식)의 일정 등을 꾸준히 보고했다.

그러나 7월, 이에야스는 가신 혼다 마사즈미를 통해 종의 명문에 불길한 내용이 있다며 대불 공양을 연기하라고 통보했다. 이에야스는 교토 오산(五山)의 고승들과 유학자 하야시 라잔에게 명문 해독을 지시했다.[32][33] 문제가 된 구절은 '국가안강'(國家安康)과 '군신풍락'(君臣豊樂)이었다. 이에야스 측은 '국가안강'이 이에야스(가강)의 이름 가운데를 잘라 저주하는 것이고, '군신풍락'은 신하(臣)와 도요토미(豊)를 이어 도요토미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에야스의 직함과 이름을 나열한 '우복사원조신가강'(右僕射源朝臣家康) 구절도 '이에야스를 쏜다(射)'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는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한 해석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14]

오산의 승려들은 대체로 이에야스의 이름(휘)을 사용한 것은 부주의나 실수이며 저주 의도까지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였다. 특히 상국사는 "무가의 법도는 모르지만, 오산에서는 휘를 피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2][37] 명문을 지은 분에이 세이칸은 이에야스에 대한 축복의 의미로 의도적으로 이름을 숨겨 넣은 것이며(숨은 제목 기법), '군신풍락' 역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숨은 제목일 뿐 악의는 없다고 해명했다.[32] 당시 서일본 지역에서는 존경의 의미로 상대방의 실명을 그대로 쓰는 관례도 있었다.[36]

호코지 종명 주요 구절 해석 논란
명문 구절이에야스 측 주장 (하야시 라잔 등)오산 승려들 견해분에이 세이칸 변명
국가안강 (國家安康)이에야스(가강)의 이름을 자로 잘라 불경함.[32][33]이름(휘)을 사용한 것은 실수이거나 부주의. 저주 의도는 불확실.[32][37]이에야스에 대한 축복의 의미로 의도적으로 이름을 숨겨 넣음 (숨은 제목).[32]
군신풍락 (君臣豊樂)豊臣을 넣어 도요토미 가문의 번영을 기원함. 막부에 대한 반역.[14](명확한 언급 부족)도요토미 가문을 위한 숨은 제목. 옛날에도 있던 예.[32]
우복사원조신가강 (右僕射源朝臣家康)이에야스를 쏜다(射)는 의미로 해석.(명확한 언급 부족)우복사는 우대신의 당나라 이름. 히데요리도 우대신이므로 구분 위해 사용.[32]



하지만 이에야스의 문제 제기는 계속되었다. 설령 악의가 없었더라도, 최고 권력자인 이에야스의 이름을 허락 없이 사용하고, 특히 이름을 분리하여 새긴 것은 당시의 상식으로 볼 때 매우 무례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32][33] 도요토미 가문 측은 8월, 가타기리 가쓰모토를 슨푸에 보내 해명하려 했으나 이에야스는 만나주지 않았다. 이후 오노 하루나가의 어머니인 오쿠라쿄노 쓰보네를 보내자 이에야스는 그녀를 정중히 대하면서도, 가쓰모토와 함께 불러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요구하며 도요토미 가문 내부의 불신을 이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14]

9월, 오사카로 돌아온 가쓰모토는 사태 해결을 위해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떠나는 등의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요도도노를 비롯한 도요토미 가문 내 강경파는 이를 도쿠가와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가쓰모토가 이에야스와 내통했다고 의심하여 동생 가타기리 사다타카, 오다 나가마스 등 온건파와 함께 오사카 성에서 추방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히데요리의 측근이었던 이시카와 사다마사 등도 성을 떠났다. 가쓰모토의 추방 소식을 들은 이에야스는 격노하며 여러 다이묘들에게 오사카 성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호코지 종명 사건은 오사카 전투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14]

4. 오사카 겨울 전투

도요토미 가문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금은을 사용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흩어진 낭인들을 전국에서 모집하며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여러 다이묘에게 오사카성 집결을 요청했으나 호응은 미미했고,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병량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모인 낭인들을 포함한 도요토미 측 병력은 약 10만 명에 달했으며,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일본어[86], 조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모토쓰구,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 등 이름난 무장들이 합류하여 이들을 '5인중'五人衆일본어이라 불렀다. 도요토미군은 오사카성에서의 농성을 결정했다.

1614년 1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세력의 성장을 막기 위해 약 20만 명의 대군[41](다른 기록에는 시마즈 군 제외 16만 4천 명[14])을 이끌고 오사카로 진격했다. 11월 19일 기즈 강木津川일본어 어귀의 요새 함락을 시작으로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고, 이후 시기노鴫野일본어, 이마후쿠今福일본어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군은 수적 우위와 조총 부대를 앞세워 초기 전투에서 승리하며 오사카성을 압박했다.

12월 4일부터 오사카성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14] 특히 성 남쪽에 사나다 노부시게가 7천 명의 병력으로 방어하던 외곽 보루인 사나다마루真田丸일본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사나다마루 전투). 사나다군은 도쿠가와군의 거듭된 공격을 격퇴하고 역습을 감행하여 포위선을 돌파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며 막부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14]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면 공격 대신 포격과 갱도전, 심리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컬버린포 4문, 세이커포 1문을 포함한 대포 17문과 국산 철제 대포 300문 등[14] 수백 문의 대포를 동원하여 성 안을 직접 포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가伊賀国일본어 출신의 닌자 부대를 동원하고[4][5][6][7], 밤마다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아 성내 병사들의 피로를 가중시켰다.[48] 12월 11일부터는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51]

12월 16일부터 시작된 집중 포격으로[54] 오사카성 혼마루本丸일본어요도도노 거처가 피격되어 시녀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4] 이 사건은 병량 부족과 계속되는 전투 및 심리전에 지쳐가던 도요토미 측 수뇌부가 강화 협상에 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도쿠가와 측 역시 장기전으로 인한 부담과 겨울 추위로 인해 강화를 원하고 있었다.[57]

12월 18일부터 교고쿠 다다타카의 진영에서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는 혼다 마사즈미와 이에야스의 측실 아차노 쓰보네阿茶局일본어가, 도요토미 측에서는 요도도노의 여동생 조코인常高院일본어이 대표로 나섰다. 19일에 강화 조건이 합의되었고, 20일에 서약서가 교환되어 강화가 성립되었다. 주요 내용은 오사카성의 혼마루本丸일본어를 제외한 니노마루二の丸일본어와 산노마루三の丸일본어 파괴, 외곽 해자(堀일본어) 매립,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신변 및 영지 보장, 성내 무사들에 대한 처벌 불문 등이었다.

그러나 강화 조건 이행 과정에서 도쿠가와 측은 '소가쿠惣構일본어의 해자'라는 문구를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약속된 외곽 해자뿐만 아니라 오사카성의 안쪽 해자까지 모두 메우고 성벽 일부까지 파괴하는 공사를 강행했다.[14] 이는 명백한 합의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으며, 이로 인해 오사카성은 방어 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종결은 응인의 난 이후 약 150년간 지속된 일본 내 대규모 전투의 종식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를 '''겐나엔부'''元和偃武일본어라고 부른다.[70][71]

4. 1. 도요토미 가문의 저항과 농성

오사카 겨울의 진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 준비에 착수하여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금은을 사용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발생한 대량의 낭인들을 전국에서 모집했다. 여러 다이묘에게 오사카성에 집결하라는 격문을 보냈으나, 실제로 참여한 다이묘는 없었고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병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였다. 또한 농성을 위한 무기와 병량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집된 낭인을 포함한 도요토미 측의 총병력은 약 10만 명에 달했다. 이 중 이름있는 낭인으로는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일본어[86], 조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모토쓰구,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가 있었으며, 이들을 '5인중'五人衆일본어이라 불렀다. 그 외에 반 나오유키塙直之일본어 등도 있었다.

오사카성에 모인 낭인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거나 전란을 틈타 출세하려는 자들로, 전투력과 사기는 매우 높았으나 각지에서 모인 탓에 통제가 어려워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도요토미군 내부에서는 작전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도요토미 가문의 장로 격인 오노 하루나가를 중심으로 한 농성파는 2중 해자로 둘러싸인 견고한 오사카성에 의지하여 막부군을 지치게 한 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자고 주장했다. 반면, 낭인 세력을 대표하는 사나다 노부시게는 먼저 기나이 지역을 제압하고 오미국[87]의 세타瀨田일본어 강까지 진격하여 관동에서 오는 막부군을 저지한 뒤, 여러 다이묘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결전을 벌이는 2단계 작전을 제안했다. 만약 다이묘들이 합류하지 않으면 그때 농성으로 전환하자는 생각이었다. 고토 모토쓰구모리 가쓰나가도 사나다의 제안을 지지하며, 이가伊賀일본어[88]오쓰大津일본어[89] 북서쪽에도 병력을 보내 도쿠가와 군의 움직임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오노 하루나가 등 도요토미 가신들의 의견에 따라, 오사카성 주변에 요새를 쌓아 경계와 연락선을 확보하고 견고한 성에서 농성하는 작전이 채택되었다.

1614년 1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측의 성장을 막기 위해 16만 4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로 향했다. 이 병력에는 도요토미 측과 동맹 관계였으나 실제 파병하지 않은 시마즈 다다쓰네의 군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11월 19일, 이에야스가 직접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기즈 강을 건너 요새를 함락시키면서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후, 이에야스는 1,500명의 병력으로 600명이 지키던 이마후쿠 마을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군이 널리 사용하던 조총(아케부스) 부대의 지원을 받은 도쿠가와 군은 다시 한번 승리했다. 오사카 성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포위 공격은 12월 4일에 시작되기 전까지 여러 작은 요새와 마을이 먼저 공격받았다.[14]

사나다 마루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7,000명의 병력과 함께 방어하던 토루식 보루(바비칸)였다. 도쿠가와 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격퇴당했고, 사나다 군은 오히려 포위선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세 번이나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수입된 유럽산 대포 17문과 일본산 철제 대포 300문을 포함한 포병을 동원하고,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는 갱도전을 지시했다.[14]

이 포위 공격 동안 도쿠가와 군은 이가 출신의 닌자 부대를 비정규군으로 활용했다. 이이 나오타카가 이끄는 닌자 부대 외에도, 핫토리 한조와 야마오카 카게츠게 휘하의 다른 이가슈伊賀衆일본어 무사들도 참전했다.[4] 또한 도도 다카토라 휘하의 무소쿠닌無足人일본어(임시 사무라이)과 같은 이가 출신의 다른 비정규 부대도 전투에 참여했다.[5][6][7]

도요토미 측이 농성하는 오사카성을 도쿠가와 측은 약 20만 명의 군대로 완전히 포위했다. 이에야스는 12월 2일, 차우스야마茶臼山일본어[41] 본진을 정하고 각 장수의 진영을 시찰하며 공성 설비(시게리) 건설을 명령했다. 4일부터 각 부대는 죽속竹束일본어(대나무 방패), 참호, 축산築山일본어(흙더미) 등 공성 설비를 만들며 오사카성에 10(町, 약 1090m)에서 5~6(町, 약 545m~654m) 거리까지 접근했다.[42] 이에야스는 10월 22일에 호코지方広寺일본어의 용광로에서 제작하도록 명령했던 철제 방패를 각 장수에게 배포했다.[43]

이 접근 과정에서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12월 3일, 4일)에서 도요토미 군이 도쿠가와 군을 격퇴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4일에 오카야마岡山일본어에 도착하여 5일, 이에야스가 화의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총공격을 제안했으나, 이에야스는 "적을 얕보지 말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생각하라"며 거절했다. 이에 히데타다는 불만을 표했다.[44]

6일, 이에야스는 스미요시住吉일본어에서 차우스야마로 본진을 옮겼고[45], 8일까지 도착한 부대에도 참호 등 공성 설비 건설을 계속 명령했다.

9일, 이에야스가 11월 23일[46]부터 이나 다다마사, 후쿠시마 다다카쓰, 모리 히데나리, 쓰노쿠라 스안에게 명령하여 건설했던, 요도강의 흐름을 니시노미야시 방면으로 돌리는 나가에바시長柄橋일본어 공사가 완료되었다. 야마토강大和川일본어이 있어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지만 강의 수심은 무릎 아래까지 낮아졌다.[47] 야마토강의 둑을 막는 공사도 진행되었으며, 각 부대에 명하여 매일 밤 세 차례(유시(酉の刻), 술시(戌の刻), 인시(亥の刻)),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아 성내 병사들의 수면을 방해했다. 이 함성은 교토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48] 이 무렵부터 오사카성 총구조물惣構일본어(성 전체 방어선)에 대한 남쪽에서의 대포 사격도 본격화되었고, 도쿠가와 측의 공성 설비는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부대는 20~30(間, 약 36m~55m), 도도 다카토라 부대는 7(間, 약 13m)까지 성벽에 접근했다.[49]

10일에는 항복을 권유하는 화살 편지를 보냈고,[50] 11일에는 가이국사도국의 광부들을 동원하여 남쪽에서부터 토루土塁일본어와 석축石垣일본어을 파괴하기 위한 갱도 굴착을 시작했다.[51] 13일, 이에야스는 다이묘 한 명당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 50개씩을 배포했다.[52] 또한 후나바船場일본어 지역의 해자 매립도 명령했다.[53] 오사카 측 장수들에 대한 회유 공작도 진행되었는데, 혼다 마사즈미가 동생이자 마에다 가문의 가신인 혼다 마사시게에게 사나다 노부유키(도쿠가와 군 소속, 사나다 노부시게의 형)와 협력하여 노부시게를 도쿠가와 측에 투항시키도록 지시한 문서가 남아 있다.

15일, 아래에서 설명할 화의 교섭이 난항을 겪자, 다음 날인 16일부터 전군에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54] 북쪽의 비젠지마備前島일본어에서만 해도 대포 100문과 석화시石火矢일본어(돌 포탄을 쏘는 화기)가 혼마루 북쪽의 오쿠고덴奥御殿일본어(안쪽 궁궐)을 향해 발사되었다. 남쪽 덴노지구에서는 기존의 총구조물 대신 혼마루 남쪽의 오모테고덴表御殿일본어(바깥 궁궐) 고타이멘조御対面所일본어(접견 장소)로 목표를 변경하여 화의가 체결될 때까지 포격을 계속했다. 이 포격에는 구니토모国友일본어에서 제작된 3(貫, 약 11.25kg)짜리 대포와 시바쓰지 리에몬芝辻理右衛門일본어단조 방식으로 제작한 철제 대포가 사용되었다. 시바쓰지 리에몬이 만든 대포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유슈칸에 보관되어 있다.

6월경 영국에서 구입한 컬버린포 4문, 세이커포 1문과 7일 전 효고에 도착한 네덜란드제 4~5(貫, 약 15kg~18.75kg)짜리 대포 12문(반카논포급)[55]도 포격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격은 비젠지마에 배치된 다쓰케류田付流일본어 포술의 명수 다쓰케 가게스미田付景澄일본어가 담당했는데, 그가 발사한 컬버린포가 오사카성 천수각에 명중하면서 강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공적으로 그의 후손은 대대로 '시로베에'四郎兵衛일본어라는 이름을 쓰며 에도 막부의 철포대를 맡게 되었다.

도요토미 측은 접근하는 도쿠가와 군에게 화승총으로 맞섰다. 처음 죽속만 있을 때는 한 번의 사격으로 300~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도쿠가와 군이 축산과 토루를 쌓자 화승총의 효과는 크게 줄었다.[56] 요도도노는 직접 갑옷을 입고 무장한 시녀 3~4명을 거느리며 초소의 병사들을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대포를 이용한 반격도 있었고, 하나와 나오유키는 하치스카 요시시게의 진영에 야습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혼마치바시 야전).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측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했고,[57] 혹독한 겨울 추위 때문에 12월 3일부터 오다 우라쿠사이를 통해 도요토미 측과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8일과 12일에도 우라쿠사이와 오노 하루나가가 혼다 마사즈미, 고토 미쓰쓰구後藤光次일본어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화 조건을 논의했다.

15일에는 요도도노가 인질로 에도로 가는 대신, 농성 중인 낭인들의 영지를 늘려주는 조건의 강화안이 도요토미 측에서 제시되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다.

도요토미 측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졌고, 도쿠가와 측이 벌이는 심리전(갱도 굴착, 함성, 총격)과 망루, 진영 등에 쏟아지는 포탄으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가 극심했다. 특히 혼마루에 대한 포격으로 요도도노의 시녀 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요도도노는 이전까지 "오사카성은 10년이라도 버틸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 결국 강화에 응하기로 결정했다(16일).

조정에서는 고요제이 상황의 명으로 17일, 무가전주인 히로하시 가네카쓰와 산조니시 사네요시를 사자로 보내 이에야스에게 강화를 권고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조정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며, 어디까지나 도쿠가와 주도로 협상을 진행하려 했다.

본격적인 협상은 18일부터 도쿠가와 측 교고쿠 다다타카의 진영에서 시작되었다. 이에야스 측에서는 측근인 혼다 마사즈미와 측실 아차노 쓰보네가, 도요토미 측에서는 요도도노의 여동생이자 다다타카의 의붓어머니인 조코인이 사자로 나섰다. 19일에 강화 조건이 합의되었고, 20일에 서약서가 교환되어 강화가 성립되었다. 같은 날,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여러 장수에게 포격을 중지시켰다.

강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도요토미 측 조건:
  • 혼마루를 제외한 니노마루二の丸일본어, 산노마루三の丸일본어를 파괴하고, 소가쿠惣構일본어의 남쪽, 서쪽, 동쪽 해자를 매립할 것.
  •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지 않는 대신, 오노 하루나가와 오다 우라쿠사이로부터 인질을 받을 것.
  • 도쿠가와 측 약속:
  •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신변 안전과 본래 영지의 안전을 보장할 것.
  • 성 안의 여러 무사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을 것.


이 외에도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간토 지방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결정되었다(단, 니노마루를 파괴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사료도 존재한다[58]).

강화 조건 중 성곽 파괴와 해자 매립은 니노마루는 도요토미 가문이, 산노마루와 외해자外堀일본어는 도쿠가와 가문이 담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성곽 해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대개 해자 일부를 메우거나 성벽 모서리를 허무는 정도였고, 외곽의 외해자만 메우는 의례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도

4. 2. 전투의 전개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 준비에 착수하여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금은을 사용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발생한 대량의 낭인들을 전국에서 모집했다. 도요토미 측 여러 다이묘에게 오사카성 집결 격문을 보냈으나 참여한 다이묘는 없었고,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병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였다. 농성을 위한 무기와 병량도 모으기 시작했다. 모집한 낭인을 합쳐 도요토미 측 총병력은 약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 중 사나다 노부시게,[86] 조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모토쓰구,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 5명을 '5인중(五人衆)'이라 불렀다. 그 외에 하나와 나오유키(塙直之) 등도 있었다. 오사카성에 모인 낭인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복수심이나 전란을 틈탄 출세욕 등으로 전투력과 사기는 높았으나, 통제가 어려워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도요토미군 내부에서는 작전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가문의 장로인 오노 하루나가를 중심으로 한 농성파는 견고한 오사카성에서 막부군을 지치게 한 뒤 유리한 강화를 이끌어내려 했다. 반면, 사나다 노부시게는 먼저 기나이를 제압하고 오미국[87] 세타(瀨田)강으로 진격해 막부군을 막고, 여러 다이묘를 규합하여 결전을 벌이거나, 여의치 않으면 농성으로 전환하는 2단계 작전을 주장했다. 고토 모토쓰구모리 가쓰나가도 사나다의 제안을 지지하며 이가(伊賀)[88]와 오쓰(大津)[89] 방면에도 병력을 보내 움직임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오노 하루나가 등 도요토미 가신의 의견에 따라 주변에 요새를 쌓고 오사카성에서 농성하는 작전이 채택되었다.

전투는 1614년 11월 19일(음력 게이초 19년 10월 19일) 기쓰가와구치(木津川口)의 요새 전투로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3천 명의 병력으로 기즈 강 도하 작전을 감행하여 요새를 함락시켰다.[14] 이후 11월 26일(음력 10월 26일)에는 시기노(鴫野)와 이마후쿠(今福)에서, 11월 29일(음력 10월 29일)에는 하쿠로부치(博労淵), 노다(野田)·후쿠시마(福島)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러 요새가 함락되자 11월 30일(음력 10월 30일) 도요토미군은 남은 요새를 파괴하고 오사카성으로 철수했다.

도요토미군이 철수한 오사카성을 도쿠가와 측은 약 20만 명(시마즈 다다쓰네 군 제외 시 16만 4천 명[14])의 대군으로 완전히 포위했다. 이에야스는 12월 2일(음력 11월 2일) 자우스 산(茶臼山)에 도착하여[41] 시게리(砦, 공성 시설) 건설을 명령했다. 각 부대는 죽묶음, 참호, 축산(築山)[90] 등을 방패 삼아 성에 접근해 나갔다.[42] 히데타다는 12월 5일(음력 11월 5일) 총공격을 제안했으나, 이에야스는 "적을 얕보지 말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생각하라"며 이를 거절했다.[44] 이가 출신 이이 나오타카가 이끄는 닌자 부대와 핫토리 한조 휘하의 이가 무사 등 비정규군도 동원되었다.[4][5][6][7]

이 포위전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12월 3일(음력 11월 3일)부터 4일(음력 11월 4일)까지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였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7천 명의 병력이 방어하는 성 남쪽의 사나다마루(토루식 바비칸)에서 도요토미군은 여러 차례 도쿠가와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역습을 감행하여 세 번이나 포위선을 돌파하는 등 막부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14]

사나다마루 공략에 실패한 이에야스는 공성 전략을 바꾸었다. 12월 9일(음력 11월 9일)부터는 컬버린포 4문, 세이커포 1문 등 유럽에서 수입한 대포 17문과 국산 철제 대포 300문을 동원한[14] 본격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또한 요도가와의 흐름을 니시노미야 방면으로 돌리는 공사를 완료하여 강의 수심을 낮추고,[47] 밤마다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아 성내 병사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심리전을 펼쳤다.[48] 12월 11일(음력 11월 11일)부터는 갱도를 파 성벽 아래를 공략하려 했고,[51] 12월 13일(음력 11월 13일)에는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배포하며[52] 공성 준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사나다 노부시게 등 오사카 측 무장에 대한 회유 공작도 진행했으나 노부시게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폭로했다.[14]

12월 16일(음력 11월 16일)부터는 전군에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54] 특히 본마루 북쪽의 오쿠고덴(奥御殿)과 남쪽의 오모테고덴 고타이멘죠(表御殿御対面所)를 집중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요도도노의 거처가 피격되어 시녀 8명이 사망하는[14] 참사가 발생했다. 이에 앞서 16일 밤(음력 11월 16일 밤)에는 하나와 나오유키가 하치스카 요시시게 군대에 야습을 감행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혼마치바시 야전).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측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식량 부족[57]과 혹한 속 장기 주둔의 어려움 때문에 일찍부터 강화를 모색했다. 도요토미 측 역시 병량과 탄약 부족, 계속되는 포격과 심리전으로 인한 피로 누적, 특히 요도도노가 시녀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강화에 응하기로 하면서[14]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12월 18일(음력 11월 18일)부터 교고쿠 다다타카의 진영에서 도쿠가와 측 혼다 마사즈미, 아차쿠와 도요토미 측 사자 조코인(요도도노의 여동생)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어, 12월 19일(음력 11월 19일) 강화 조건이 합의되고 20일(음력 11월 20일) 서약서 교환으로 강화가 성립되었다.

강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도요토미 측: 오사카성의 본마루만 남기고 니노마루(二の丸), 산노마루(三の丸)를 파괴하며, 소가쿠(惣構, 성 전체를 둘러싼 방어 시설)의 남쪽, 서쪽, 동쪽 해자를 매립한다.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지 않는 대신 오노 하루나가, 오다 유라쿠사이가 인질을 보낸다.
  • 도쿠가와 측: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신변과 본령(本領) 안전을 보장한다. 성내 여러 무사들의 죄를 묻지 않는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간토(関東) 하향은 요구하지 않는다. (단, 니노마루를 파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료도 있다[58])


강화 조건 이행 과정에서 해자 매립 범위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도쿠가와 측은 공사 책임자로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혼다 다다마사 등을 임명하고 포위군과 주민을 동원하여 당초 합의된 외해자(外堀)뿐 아니라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 즉 내해자(内堀)까지 모두 매립하고 성벽 일부까지 파괴하는 공사를 강행했다. 공사는 다음 해 1월 23일에 완료되었다. 막부 측이 강화 조건의 '소가쿠(惣構)'라는 문구를 '모든 해자'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내해자까지 매립했다는 비판이 후대에 제기되었으나, 이는 당시 1차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련 제후들의 서신에서도 해자 매립을 둘러싼 분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해자 매립까지 포함하는 것이 당초 양측의 합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로써 오사카성은 방어 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4. 3. 화친 교섭과 해자 매립

오사카 겨울의 진이 장기화되면서 양측 모두 어려움에 직면했다. 도쿠가와군은 오사카성의 견고한 방어와 사나다마루 전투 등에서의 손실, 추운 겨울 속 진지 생활로 지쳐갔고,[57] 도요토미군은 병량과 탄약 부족에 시달렸다. 또한 도쿠가와군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12월 9일부터 매일 밤 함성을 지르며 총을 쏘아 성 안 병사들의 수면을 방해하고,[48] 10일에는 항복을 권유하는 화살 편지를 보내는 등 압박을 가했다.[50] 게다가 16일부터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도입한 컬버린포, 반카논포 등[55] 강력한 대포를 동원하여 혼마루를 직접 겨냥한 포격을 시작했다.[54] 이 포격으로 덴슈天守일본어[92]가 피해를 입고, 요도도노시녀 여럿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14] "오사카성은 10년이라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하던 요도도노마저 큰 충격을 받고 화친에 응하기로 결심했다(16일).[[14]

요도도노는 포격 이후 화친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2월 18일, 도쿠가와측 교고쿠 다다타카의 진영에서 본격적인 화친 교섭이 시작되었다. 도쿠가와측에서는 혼다 마사즈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인 아차쿠가, 도요토미측에서는 요도도노의 여동생이자 교고쿠 다다타카의 의모인 조코인이 대표로 나섰다. 교섭은 19일에 타결되었고, 20일에는 다음 내용의 서약서가 교환되었다.[14]

그러나 화친 조건 중 해자 매립 범위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도요토미측은 바깥 해자만을 메우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도쿠가와측은 성의 모든 해자를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 차이를 명분 삼아 도쿠가와측은 혼다 마사즈미의 지휘 아래[14] 합의 직후부터 독단적으로 해자 매립 공사를 강행했다. 도요토미측이 이것이 합의 내용과 다르다고 항의했지만,[14] 도쿠가와측은 공사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바깥 해자뿐만 아니라 안쪽 해자까지 모두 메워버렸으며, 심지어 합의에 없던 성벽까지 파괴하여 오사카성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14]

5. 오사카 여름 전투

오사카 여름 전투


겨울 전투 이후 맺어진 화친은 오래가지 못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교토에서 슨푸로 돌아간 뒤에도 전쟁 준비를 계속했으며, 오사카성낭인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빌미로 도요토미 가문을 압박했다. 1615년 4월,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혼례를 명분 삼아 상경하여 여러 다이묘에게 출진 명령을 내렸고, 에도에서 올라온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니조성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당시 막부 군의 병력은 약 15만 5천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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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화친 이후 일부 낭인이 해고되어 도요토미 군의 병력은 약 5만 5천 명으로 감소한 상태였다. 해자가 메워져 방어 시설이 약화된 오사카성에서의 농성전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측은 성 밖으로 나가 적극적인 야전을 벌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1615년 4월 말부터 도요토미 군은 오사카 근교에서 도쿠가와 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4월 29일(양력 5월 26일) 벌어진 가시이 전투에서는 오노 하루후사와 반 나오유키가 이끄는 도요토미 군이 아사노 나가아키라 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반 나오유키가 전사했다.[14]

5월 6일(양력 6월 2일)에는 여러 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야마토 방면에서는 도묘지 전투가 벌어져 고토 마타베이와 스스키다 가네스케 등이 전사했고, 사나다 유키무라다테 마사무네 군과 교전 후 오사카 성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가와치 방면에서는 야오에서 조소카베 모리치카도도 다카토라 군에게 승리했으나, 와카에에서 기무라 시게나리가 이이 나오타카 군과의 격전 끝에 전사하면서 조소카베 군도 후퇴했다.[14]

연이은 패배로 도요토미 군은 오사카 성 근교까지 밀려났고, 5월 7일(양력 6월 3일)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결국 오사카성은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도노는 자결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오닌의 난 이후 약 150년간 간헐적으로 이어져 온 일본 내 대규모 전투는 종식되었으며, 이를 '''겐나엔부'''(元和偃武|겐나엔부일본어)라고 부른다.[70][71] 이는 도쿠가와 막부가 장기적인 안정 통치를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14]

5. 1. 재전과 도요토미 군의 야전 전략



오사카 겨울의 진 이후 화친이 성립되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교토에서 슨푸로 돌아간 뒤에도 전쟁 준비를 계속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역시 후시미로 물러났으나, 이에야스는 쿠니우모 공장에 대포 주조를 명령하는 등 재전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1615년 3월, 교토 쇼시다이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오사카 성 내 낭인들의 소란, 해자 복구 시도, 교토후시미 방화 계획 등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 이를 빌미로 도쿠가와 측은 도요토미 가문에 낭인 해고 또는 다른 영지로의 이봉(移封)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4월, 이에야스는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혼례를 위해 교토로 상경한 후, 여러 다이묘에게 출진 준비를 명령하고 후시미에 집결시켰다. 이후 에도에서 올라온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니조성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당시 막부 군의 전력은 약 15만 5천 명에 달했다. 5월 5일 교토를 출발하며 이에야스는 "3일 치 병량이면 충분하다"고 말해 단기 결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한편, 도요토미 가문 내부에서는 4월 9일, 도쿠가와 측과의 교섭을 주도했던 오노 하루나가가 성 안에서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또한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 낭인들은 화친 조약으로 메워졌던 해자를 다시 파기 시작했다. 화친 이후 일부 낭인이 해고되어 도요토미 군의 병력은 약 5만 5천 명으로 감소한 상태였다. 방어 시설이 취약해진 오사카성에서의 농성전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도요토미 수뇌부는 성 밖으로 나가 적극적인 야전을 통해 결전을 벌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시기, 오다 나가마스는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떠나 오사카성에서 퇴거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야전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오사카 성 주변에서는 다시 한번 대규모 충돌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5. 2. 전투 과정



오사카성(大坂城) 화재 1663년 그림, 뉴욕 공공도서관 출처


겨울의 진 이후 화의가 성립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슨푸로, 도쿠가와 히데타다후시미성으로 돌아가면서도 구니토모 대장간에 대포 제조를 명령하는 등 전쟁 준비를 계속했다. 게이초 20년(1615년) 3월, 오사카성에서 낭인들의 소란, 해자 복구 시도, 교토 방화설 등 불안한 움직임이 보고되자 도쿠가와 측은 낭인 해고 또는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 이전을 요구했다.

4월,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혼례를 명분으로 나고야로 이동했고, 여러 다이묘에게 출진 준비를 명령했다. 에도에서 서쪽으로 올라온 히데타다와 니조성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때 도쿠가와 군의 병력은 약 15만 5천 명에 달했다. 반면, 도요토미 측은 화의 이후 일부 낭인이 해고되거나 이탈하여 병력이 약 5만 5천 명(다른 기록에는 7만 8천 명)으로 감소했다. 해자가 메워져 방어력이 약화된 오사카성에서의 농성전이 불리하다고 판단, 적극적인 야전을 선택했다. 이 무렵 오다 나가마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떠났다.

도요토미 측은 선제공격에 나섰다. 오노 하루후사 부대는 4월 26일 쓰쓰이 조케이가 지키는 야마토 고리 산성을 함락시키고 주변 마을에 불을 질렀다. 4월 29일에는 기슈 공격을 시도했으나, 선봉 반 나오유키 등이 아사노 나가아키라 군과의 가시이 전투에서 독단적으로 교전하다 전사했다.[14] 오노 하루후사는 아사노 군과 대치하며 5월 6일까지 사카이 공방전을 벌였다.
야마토 방면: 도묘지 전투 (5월 6일)5월 6일, 야마토 방면에서 오사카성으로 향하던 도쿠가와 군 약 3만 5천 명을 저지하기 위해 '''도묘지 전투'''가 벌어졌다. 도요토미 군은 급조된 탓에 부대 간 연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고토 모토쓰구가 이끄는 2,800명은 단독으로 고마쓰 산(小松山)에 진출하여 다테 마사무네, 미즈노 가쓰나리,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등이 이끄는 2만 이상의 도쿠가와 군과 맞서 분전했으나 전멸하고 모토쓰구도 전사했다. 뒤이어 도착한 아카시 다케노리, 스스키다 가네스케 등 3,600명의 병력도 교전 중 스스키다 가네스케 등이 전사했다.

더 늦게 도착한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 모리 가쓰나가 등 1만 2천 명의 병력이 전투에 참가했다. 사나다 부대는 다테 마사무네 부대의 선봉인 가타쿠라 시게나가 부대의 진군을 저지했으나,[93] 야오·와카에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후퇴했다. 도쿠가와 군도 연이은 전투로 지쳐 추격하지 못했다.
가와치 방면: 야오·와카에 전투 (5월 6일)같은 날, 가와치 방면에서는 '''야오‧와카에 전투''' 八尾・若江合戦일본어가 벌어졌다. 기무라 시게나리가 이끄는 6천 명과 조소카베 모리치카, 마시타 모리쓰구 등이 이끄는 5,300명의 도요토미 군이 교토 방면에서 오던 도쿠가와 군 본대 12만 명을 맞아 싸웠다.

야오(八尾)에서는 조소카베 모리치카 부대가 안개 속에서 도도 다카토라 부대 5천 명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도도 일족 다수를 죽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측 원군이 도착하고 기무라 부대가 패퇴하자 포위를 우려하여 후퇴했다.

와카에(若江)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 부대가 도도 다카토라 부대 일부를 격파한 후, 이이 나오타카 부대 3,200명과 격전을 벌였다. 시게나리는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도도 군과 이이 군은 큰 피해를 입어 다음 날 결전의 선봉을 맡지 못하게 되었다.

5월 6일의 전투 결과, 도요토미 군은 큰 손실을 입고 오사카 성 근교까지 밀려났다.
덴노지·오카야마 전투 (5월 7일)5월 7일, 최후의 결전인 '''덴노지·오카야마 전투'''가 벌어졌다. 도요토미 군은 오사카시 아베노구에서 히라노구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정오 무렵, 모리 가쓰나가 부대가 도쿠가와 측 척후를 사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리 가쓰나가 부대는 맹렬한 기세로 혼다 다다토모 부대를 격파하고 다다토모를 전사시켰으며, 이어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와 다다나가 부대도 격퇴하여 두 사람을 전사시켰다. 사카기바라, 센고쿠, 스와 부대 등도 돌파당해 이에야스 본진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동시에 사나다 노부시게 부대는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와 격전을 벌이다 "아사노 나가아키라가 배신했다"는 거짓 정보로 적이 동요한 틈을 타 돌파, 이에야스 본진을 향해 세 차례에 걸쳐 맹렬히 돌격했다. 이에야스 본진은 대혼란에 빠져 후퇴했고, 이에야스의 마인(馬印)[97] 기수마저 도주했으며 이에야스 자신도 할복을 고려할 정도였다. 하타모토[98] 중에는 멀리 도망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후퇴했던 병력들이 돌아와 사나다 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측면 공격까지 받으면서 사나다 군은 격퇴되었다.

오카야마 방면에서도 오노 하루후사 부대가 마에다 군(마에다 도시쓰네 군)을 돌파하고 히데타다 본진을 급습했다. 히데타다 본진도 혼란에 빠졌으나, 히데타다 자신이 버티고 이이, 도도 부대 등이 돌아와 지원하면서 오노 군을 격퇴했다.[99]

도요토미 군의 후위를 맡았던 오노 하루나가와 나나테구미 부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출진을 기다렸으나, 요도도노의 만류로 시간을 지체하여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격 부대들이 격퇴당한 후였다. 고립되고 지친 도요토미 군은 오후 3시경,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 밀려 괴멸되었다. 사나다 노부시게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남은 부대는 오사카 성으로 퇴각했다.
오사카 성 함락과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해자가 메워진 오사카 성은 방어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에치젠 군이 가장 먼저 성 안으로 진입했고, 뒤이어 도쿠가와 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성 안에서는 내통자에 의해 덴슈카쿠(천수각)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5월

5. 3. 오사카 성 함락과 도요토미 가문 멸망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패배한 도요토미 군은 오사카 성 본성(本丸)으로 총퇴각했다. 이미 해자가 메워져 방어 능력을 상실한 오사카 성은[60] 도쿠가와 군의 맹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사나다 부대를 격파한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이끄는 에치젠(越前) 군이 선봉에 서서 성 안으로 쇄도했고, 다른 도쿠가와 군 부대들도 뒤따라 성내로 난입했다.

설상가상으로 히데요리 휘하에서 오사카 성의 주방을 책임지던 다이각 요자에몬(大角与左衛門)이 도쿠가와 측에 투항하여 부하들에게 성의 대주방에 불을 지르게 하는 배신 행위까지 벌어졌다.[59][60] 불길은 삽시간에 성 전체로 번져나갔고, 결국 오사카 성은 화염에 휩싸이며 함락되었다.[60] 타오르는 불길은 밤하늘을 밝혔고, 멀리 교토에서도 오사카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이 보였다고 전해진다. 오사카 성 함락 직후인 1615년 6월 11일자 나가사키 히라도 네덜란드 상관 관계자의 보고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사면을 얻기 위해 투항한 일부 다이묘들이 히데요리를 배신하고 성에 불을 지르려다 실패하여 성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61]

5월 7일 오후 4시경, 오노 하루나가는 가신 요네쿠라 곤에몬(米倉権右衛門)을 사자로 보내 센히메를 성 밖으로 탈출시킨 뒤, 자신을 포함한 가신들이 할복하는 대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요도도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결정을 맡겼다. 그러나 다음 날인 8일, 히데타다는 히데요리 등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등이 피신해 있던 야마자토마루(山里丸) 구역의 불타지 않은 창고는 이이 나오타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정오경 이이 군은 철포를 발사하여 할복을 재촉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도노를 포함한 32명은 자결했고, 그들이 있던 창고는 불길에 휩싸였다.[62]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주군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오쿠라쿄노츠보네, 아에바노츠보네(饗庭局), 오노 하루나가, 오노 하루후사 등 충성스러운 가신들도 뒤따라 자결했다.

오사카 성 함락 후 혼란 속에서도 도요토미 측 잔존 세력의 저항은 한동안 계속되었다.[63] 당시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당대 일류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오사카 여름의 진 도병풍」(통칭 구로다 병풍, 중요문화재)에는 함락 후 도쿠가와 군의 잔혹한 행위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병풍에는 도쿠가와 측 잡병들이 오사카 성 아래 민간인들을 상대로 가짜 목을 베거나 약탈하고 옷을 벗기는 모습, 강을 건너 도망치는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참상을 짐작하게 한다.[63]

이 전투의 종결로 오닌의 난 이후 약 150년간 일본 내에서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대규모 내전 상태는 막을 내렸다. 이를 '''겐나엔부'''라고 부른다.[70][71] 이는 도쿠가와 막부가 약 250년간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가는 기반이 되었다.[14]

6. 전투에 대한 평가



오사카 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이끄는 막부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측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예상외의 고전을 겪었다. 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도쿠가와군은 병력의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포위 섬멸과 같은 전술 대신 전선에서 비슷한 규모의 병력끼리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도요토미군은 사나다 노부시게 등이 구축한 야전 축성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방어에 나섰고, 이는 나가시노 전투세키가하라 전투처럼 공격하는 쪽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결과를 낳았다. 도쿠가와군의 선봉 부대가 무너지고 도요토미군이 반격에 나서는 상황까지 벌어졌다.[101]

또한, 이전까지 유례가 없던 대규모 병력을[101] 통솔하고 기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점도 고전의 원인이었다. 겨울의 진 이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연이어 병력을 동원하면서 발생한 재정적 부담을 염려한 이에야스가 조기 결전을 서두른 것도 혼란을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 이에야스 개인에게도 이 전투는 부대의 장수가 전사할 정도로 인적 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한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 멸망에 따를 수 있는 윤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직속 가신인 후다이(譜代)[102] 가신들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측에 속했던 다이묘들에게도 오사카 공격을 명령하는 정치적 계산을 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측은 승산이 희박한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벌였는데, 이는 도쿠가와군을 괴롭힌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비록 자포자기 상태에 가까웠지만, 그들의 저항은 매우 격렬했다.

오사카 성 함락 과정에서는 성 내부의 배신과 방화[59][60]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함락 이후에는 도쿠가와군 병사들에 의한 약탈과 폭력 행위가 자행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그리게 한 「오사카 여름의 진 도병풍」에는 이러한 참상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다.[63]

이 전투는 도요토미 가문의 완전한 멸망과 함께 오닌의 난 이후 약 150년간 지속된 센고쿠 시대의 대규모 내전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를 '''겐나엔부(元和偃武)'''라고 부르며[70][71], 이후 에도 시대의 장기적인 평화 체제가 확립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7. 전후 처리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는 8세의 나이로 숨어있던 곳에서 체포되어 교토 로쿠조가와라(六条河原)에서 참수당했다.[103] 전설에 따르면, 참수되기 전 어린 구니마쓰는 이에야스를 향해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배신과 잔혹함을 용감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히데요리의 딸 나아히메는 센히메가 양녀로 삼아 출가시킨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져, 가마쿠라의 도케이에서 덴슈니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묘소와 교토의 도요쿠니 신사는 이후 막부에 의해 파괴되었다.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5월 11일에 참수당했으며, 그를 비롯한 도요토미 가문 잔당에 대한 추적은 10년 이상 계속되었다.[103] 성이 함락된 후 혼란 속에서 도쿠가와군 병사들에 의한 약탈과 강간 등 난폭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이는 오사카 여름의 진 도병풍(통칭 구로다 병풍)에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63] 당시 한 평민이 남긴 기록 「미시카요노 모노카타리(見しかよの物かたり)」에는 그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가담자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으며, 주요 인물들의 처분은 다음과 같다.

인물처분 내용비고
호소카와 오키아키자결아버지 다다오키의 명령
마시다 나가모리자결아들 모리쓰구의 도요토미 가담에 대한 연좌 책임 (유배지 이와쓰키에서 자결 명령)
후루타 오리베자결구니마쓰를 숨겨주었다는 의혹[64]
후루타 시게히로사형후루타 오리베의 아들, 연좌
아카시 다케노리행방불명아들 아카시 고사부로는 1633년 사쓰마에서 체포
나이토 모토모리자결데루모토의 밀명으로 참전 후 체포, 모리 가문은 관계 부인. 자녀들도 처형됨.
후쿠시마 다카하루개역마사노리의 동생, 히데요리 내통 혐의 (야마토 우다마쓰야마번)
마쓰마에 요시히로참수마쓰마에번 번주 게이히로의 아들, 내통 혐의로 아버지의 명령
무라야마 도안참수 (1619년)나가사키 다이칸, 도요토미 가담 및 기리시탄 보호 혐의. 처자도 1622년 겐나 대순교에서 처형



오다 요리나가는 도요토미군으로 싸웠기 때문에 아버지 오다 유라쿠사이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다. 반면, 마키시마 아키미쓰나 오다 마사즈미처럼 특별한 사정으로 사면된 경우도 있었고, 센다이번처럼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조카인 시바타 도모이를 가신으로 삼거나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들 사나다 모리노부를 보호하는 등 번에 따라 잔당 처리에 온도 차가 있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도 대가가 있었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오사카 성 제일 먼저 진입한 공에 대한 포상이 초화견충이라는 다기 하나뿐인 것에 불만을 품고 난행을 저질러 결국 영지를 몰수(개역)당했다.[104]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는 여름의 진에서 히데타다의 본진을 추월하는 군율 위반과 전투 불참 등으로 모반 의혹을 받아 영지가 몰수(개역)되었다.

시마즈 다다쓰네가 이끌던 사쓰마번은 번 내부 사정으로 겨울, 여름의 진 모두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아 한때 모반 의혹을 받기도 했다.[105] 이 사건 이후 시마즈 가문은 막부의 사업이나 시마바라의 난 등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부는 오사카 성에 남겨진 도요토미 가문의 재보를 철저히 수색하여 금 1만 8천 매, 은 2만 4천 매를 회수했다.[65] 오사카는 막부 직할령이 되었고,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가 초기 도시 부흥을 담당한 후 야마토 고리야마로 이봉되자 오사카 조다이가 설치되어 서일본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막부는 일국일성령[21]무가제법도를 공포하여 다이묘들의 성 소유를 제한하고 성곽의 신축 및 수리를 엄격히 통제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의 많은 성들이 파괴되었다.

에도 시대에 판매된 가장 오래된 가와라반(かわらばん) 신문 중 하나로, 오사카 성 함락을 묘사하고 있다


전쟁의 발단이 된 방광사의 "국가안강(国家安康)" 명문 종은 에도 시대 내내 종루에 걸려 있었으며, 땅바닥에 놓여 방치되었다는 속설은 메이지 시대 폐불훼석 당시의 일시적인 상황이 와전된 것이다.[67][68][69]

이 전투를 끝으로 오닌의 난 이후 약 150년간 간헐적으로 이어져 온 일본 내 대규모 전투는 종식되었다. 이를 겐나엔부(元和偃武)라고 부른다.[70][71] 한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 중 입은 부상 등의 영향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약 1년 후인 1616년 6월 1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8. 전설

오사카 전투는 그 극적인 전개와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후대에 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남겼다.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영화 오사카성 이야기(1961년)나 가토 다이 감독의 산다 가문의 용감한 기록(1963년)과 같이 전투 자체를 주요 소재로 다룬 작품뿐만 아니라, 영화 하라키리(1962년)의 주인공처럼 전투 참전 경험이 인물의 배경 설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22][23]

또한, 비디오 게임에서도 오사카 전투는 중요한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여러 주요 인물 이야기의 마지막 무대로 그려지며, 섀도우 택틱스: 블레이드 오브 더 쇼군이나 니어(Nioh)의 DLC처럼 공성전의 특정 국면을 게임 미션으로 재현하기도 한다.[24] TV 시리즈 사무라이 래빗: 우사기 크로니클이나 운명의 갈림길(1974년) 역시 오사카 공성전을 주요 배경 스토리로 삼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오사카 전투는 재해석되고 소비되면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여러 흥미로운 전설들이 함께 전해지게 되었다. 특히 전투의 비극적 결말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실제로는 살아남아 가고시마로 도주했다는 생존설이나, 반대로 승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속설 등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이는 패자에 대한 동정이나 승자에 대한 의구심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서에서 다룬다.

8. 1.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사나다 노부시게[106]의 활약은 눈부셨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도 가부키 공연이나 민화의 소재가 되는 등, 도쿠가와 정권 하에서도 후세까지 널리 퍼졌다. 특히 에도 시대 중기에 쓰여진 '사나다 3대기'는 노부시게 개인뿐 아니라 사나다 가문 전체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덴노지 전투 당시 그의 용맹함은 시마즈 가문의 기록인 사쓰한 구기(薩藩旧記)에도 나타나는데, "사나다, 일본 제일의 병사(真田、日本一の兵)"라 칭하며 이에야스가 할복까지 생각할 정도로 도쿠가와 측을 위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야스 본진을 수비하던 도도 다카토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에도 "주군의 본진이 무너졌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도도 다카토라의 군대 역시 사나다 군의 맹렬한 기세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놀란 이에야스는 본진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다카토라 자신도 이에야스의 안위를 확인할 겨를 없이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당시 이에야스를 호위하던 친위대조차 사나다 군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이에야스를 남겨두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에도 남아 있다.

사나다 군과 모리 가쓰나가 군이 어떻게 이에야스 본진까지 육박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후세의 민화나 그림, 역사 만화 등에서는 다양한 상상도가 그려졌다.

노부시게의 최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오사카 덴노지의 야스이 신사(安居神社) 경내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야스이 신사는 덴노지 공원, 차우스야마 북쪽에 위치한 잇신지(一心寺)의 북쪽에 자리한다. 야스이 신사에는 '사나다 유키무라 전사 유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에는 메이지 시대 구 제국육군 참모본부가 전사지 선정에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노부시게를 죽였다고 알려진 인물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의 철포대장 니시오 무네쓰구(西尾宗次)인데, 그가 전공을 과장하여 보고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 보고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무네쓰구는 후에 고향인 후쿠이현 후쿠이시에 '사나다 지장'(真田地蔵)을 세우고 노부시게의 명복을 빌었다.

8. 2. 히데요리 생존설

가고시마현에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전투에서 죽지 않고, 수행자로 변장시킨 도요토미 히데요리, 시게나리를 데리고 가고시마로 도주했다는 속설이 있다. 교토오사카에서는 전투 직후부터 "花の様なる秀頼様を、鬼の様なる真田がつれて、退きものいたよ鹿児島へ|꽃처럼 고운 히데요리 님을, 귀신 같은 사나다가 데리고, 가고시마로 물러났다네일본어"라는 동요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8. 3. 이에야스 사망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여름 전투 중 사나다 유키무라(사나다 노부시게, 真田幸村일본어)가 이끄는 군대에게 중상을 입고 사카이의 난쇼지(南宗寺일본어)로 피신했다가 결국 사망했다는 속설이 있다. 실제로 사카이의 난쇼지(南宗寺일본어) 경내에는 '이에야스의 묘'라고 불리는 무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역사 만화가 출판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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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문서 豊臣家が一大名に転落したとする見解と(今谷明『武家と天皇』)、豊臣家が西国を支配する二重公儀体制になったとする見解がある(笠谷和比古)
[26] 문서 毛利輝元書状(『萩藩閥閲録』)、『義演准后日記』慶長七年十二月晦日条、『鹿苑日録』慶長八年四月二十日条(当時の僧録は西笑承兌)など。
[27] 문서 関ヶ原の戦いの直後に九条兼孝が関白に任官したことにより、秀頼が関白就任への可能性を絶たれたとする見解(今谷明『武家と天皇』)もある。慶長10年には兼孝の次に摂関家の近衛信尹が関白に任じられている。
[28] 논문 2012
[29] 문서 2人の応対や礼法などを分析し、この会見について秀頼が家康に臣従させられた(今谷明、本多隆成、渡邊大門)、対等な立場での会見であった(笠谷和比古)と両方の見解がある。
[30] 문서 これをもって秀頼の臣従は成っていないとする見解(笠谷和比古)と、秀頼を慮りつつ孤立化を図ったとする解釈がある(渡邊大門)。
[31] 문서 慶長11年に、家康は朝廷より武家官位推挙権を獲得していた。豊臣家は依然として徳川幕藩体制の外にあり、幕府の制定した法令には縛られないというのが豊臣側の論理である。
[32] 논문 2007
[33] 논문 2012
[34] 서적 ケンペルと徳川綱吉 ドイツ人医師と将軍との交流 中央公論社 1994
[35] 서적 方広寺大仏鐘銘草稿本(京都市歴史資料館蔵) 2015
[36] 서적 真田信繁の書状を読む 星海社
[37] 서적 関ヶ原合戦と大坂の陣
[38] 문서 これは国家安康(家康)と君臣豊楽(秀頼)の文言が鐘に並んで(しかも後者の方が一段高く)刻印されていることを指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
[39] 문서 接収米の内訳は福島正則分八万石、徳川家分三万石(ただし、接収を免れたという説もある)、諸大名分三万石、商人からの買米二万石。
[40] 문서 この軍議が実際にこの内容で行われたかどうかどうか、行われたとすればいつかについてははっきりしない。ただ、浪人衆入城が10月6日、同日に家康より伏見へ出陣を命じられた近畿の諸大名が現地に着いたのが16日なので、浪人衆が唱えたとされる策は現実性は乏しい(また、伏見城には平時より城代松平定勝や大番2組等が詰めている)
[41] 간행물 大日本史料
[42] 간행물 大日本史料
[43] 간행물 大日本史料
[44] 간행물 大日本史料
[45] 간행물 大日本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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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간행물 大日本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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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간행물 大日本史料
[55] 서적 真説鉄砲伝来 平凡社
[56] 간행물 大日本史料
[57] 문서 ただし、11月28日に小堀政一に命じて蔵米8万石と豊臣氏の没収知行米5万8千石を兵糧とするように命じているので、徳川方の兵糧不足は一時的なものと思われる
[58] 문서 大名や家康近臣、宣教師の記録には二の丸破壊の記述があり、当代記や複数の覚書には二の丸破壊は記されていない
[59] 간행물 続史籍集覧 第8冊 2017-11-25
[60] 간행물 徳川実紀 第1編 2017-11-25
[61] 뉴스 2016年9月22日朝刊34面に掲載された記事。 朝日新聞 2016-09-22
[62] 문서 現在の大阪城公園内には天守閣北側の山里丸跡に「自刃の地」と記した碑があるが、落城・焼失後に江戸幕府が再建した際に縄張りを改めており、豊臣時代のものとは位置に若干の相違がある。
[63] 웹사이트 大坂夏の陣を記した新史料、松本で発見 落城後も緊迫 http://www.shinma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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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문서 같은해 우다이진(右大臣)에 취임함
[85] 문서 게이초 18년에 발표한 <공가중법도(公家衆法度)>에 위반, 다만 도요토미 가문은 의연하게 도쿠가와 막부체제 밖에 있기 때문에 막부가 제정한 법령에 묶이지 않는다는게 도요토미측의 논리였다.
[86] 문서 유키무라(幸村)
[87] 문서 현재의 시가현
[88] 문서 현재의 미에현 이가시
[89] 문서 현재의 시가현 오쓰시
[90] 문서 일종의 방어진지
[91] 문서 16~19일에는 300문의 대포가 일제히 사격했었다.
[92] 문서 일본성의 거점
[93] 문서 콘다(誉田の戦い)
[94] 문서 히데요시의 친위대
[95] 문서 이것은 사나다에 대한 대비로 생각된다. 또 실제로 마쓰다이라 다다나오(松平忠直)군 1만 5,000이 앞에 나섰기에 (처음에는 선봉을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토방향 전방에 전개하였다.
[96] 문서 구로다 나가마사가 묘사된 '오사카 여름의 진 병풍도'에서 참전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생각된다.
[97] 문서 무장의 위치와 위세를 상징하던 깃발
[98] 문서 주군휘하의 친위대
[99] 문서 이때 바로 도망친 이에야스와 버티던 히데타다 양쪽의 행동에 전투경험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100] 문서 현재 오사카성 공원내에는 덴슈각 북쪽의 유적지에 '자결한 곳'이라 쓰여진 비석이 있으나, 이것은 함락과 화재로 소실된 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재건된 오사카성에서 쓰여진것으로 원래 위치와는 차이가 있다.
[101] 문서 동원병력에서는 오다와라 전투, 임진왜란도 필적하지만 한곳에서 벌어진 야전으로 보면 이번 오사카 전투가 최대였음
[102] 문서 오랜 신하
[103] 문서 도쿠가와 막부 전복을 기도한 유이 쇼세쓰(由井正雪)의 오른팔이었던 마루하시 주야(丸橋忠弥)는 조소카베 모리치카 측실의 차남이었다.
[104] 문서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에게 내려졌다.
[105] 문서 여름의 진때 가고시마를 출발해 히라도(平戶)에 도착했을 때 오사카 전투의 정보를 듣고 돌아갔다고 한다.
[106] 문서 유키무라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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